‘미디어는 인간의 확장’ 이라는 맥루한의 견해와는 달리 안더스는 미디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 인간은 머잖아 미디어의 노예가 될 것이다. 기술은 급속히 발달하는 반면, 인간의 자연적 능력은 그렇게 빨리 발달할 수 없다. 이 격차 때문에 인간은 언젠가 제가 만든 것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라고.
이제 TV를 틀어 소위 예능이라 하는 쇼프로그램을 보자. 리얼을 표방하며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어 전에 없던 인기를 끄는 이 TV쇼들엔 자막이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허나 이 자막들 왠지 수상하다. 마치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와도 같이 쇼의 흐름을 친절한 표정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임에 틀림없다.
인물들의 대화로 이어지는 쇼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TV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공간과 시간이 파편적으로 짜여진 영화와 TV쇼의 흐름은 우리의 지각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와 속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적 쇼의 그물은 우리의 지각이 정신을 차리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게 되는데, 문자화 된 쇼인 자막은 그 구멍을 또 한차례 막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이 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막는 또 하나의 방어막의 역할을 하게된다.
허나 더 큰문제는 따로있다. 빠른 속도로 전해지는 문장들은 마치 큰 운동에너지를 갖는 강속구와 같다. 이는 강속구를 반사적으로 받아내는 훈련을 하는 운동선수들처럼,  글을 이해하는 지각적 운동을 우리가 감각적 운동으로 바꿔버리게 되는과정에서 사고가 필요한 비판적 판단이 개입할 시간이 사라지게 되어버린다는데 있다. 이때 TV자막은 우리의 지각을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속 150km짜리 문장들을 뿌려대는 투구머신이 된다.
게다가 이 공들 왠지 이상하다. ‘말’도 안되는 ‘말’들을 하고있다. 뛰어노는 아이에게 ‘나 잡아봐라’라는 극히 몰취향적 말풍선을 갖다 붙인다. 또 하나, 호스트의 유머에 웃지않는 표정의 게스트표정이 카메라에 잡혔을때, 브라운관엔 웃음의 말풍선이 게스트의 머리옆에 붙여져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 보듯 기어코 게스트를 강제로 웃음짓게 만든다. 이뿐일까?
이거, 이쯤되면 폭력이다. 자막의 대상인 쇼의 출연자에게뿐만 아니라 쇼를 보는 시청자(수용자)들에게 사적이고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아주 빠르게 던져댄다. 쇼가 진행되는 보통 거의 한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들에게 무뎌져야만 TV앞에서 견딜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쇼는 쇼일 뿐이잖아?’
과연 그럴까? 이 쇼가 다른 쇼의 표본이 되고 자막을 넣는 방식도 복제된다. ‘쇼’의 자막제작자가 덧입힌 견해가 재생산된다. 이 쇼들은 현실세계의 마케팅 수단이 되고 우린 또다시 자막의 공을 던졌던 투수들에게 노출되며 그들은 선수를 교체한다. ‘OOO안마의자’ ‘삼동이 OOO’ …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부하거나. 이성이 주관하는 지각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감각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이것. 신체가 따라갈 수 없으니 양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TV쇼 자막공격의 앞에앉은 내가 이상하리만치 유독 예민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이미 모두 무비판적이고 감각적인 수용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진보에 발 맞추지 못하는 보수 아니, 반동분자 인걸까?…

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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